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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물에서 자라난

    경북 안동
    녹전토종마을

    구수하고 정겨운 우리마을
    오계서원

    오계서원
    1570년(선조 3, 경오) 여름 이덕홍 선생이 30세 때 태조봉 남쪽 기슭 동남우에 학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기르기 위하여 오계정사를 건립하여 동재를 관성재, 서재를 험위료라 하였다. 이 당의 이름은 모두 퇴계선생과 의논하여 정한 것이며 현판은 조선의 명필인 한호가 쓴 것이라 전한다. 또 이덕홍은 오계정사와 관성재라는 시를 남겨 그 의미를 더하였다.

    오계정사 경오(1570, 선조3) [迃溪精舍 庚午〕 




    절벽 깎아 암자 세우니 버들 그늘 드리우고 / 鑿壁開菴伴柳陰
    시냇물 콸콸 소리 내며 앞 숲에서 쏟아지네 / 溪聲㶁㶁瀉前林
    여울 보는 한 가지 방법 어디에서 얻었는가 / 觀瀾一術從何得
    병든 몸 서재에 머물며 마음 수양 해보려네 / 抱病齋居試養心


    [-D001] 오계정사([迃溪精舍) :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에 있는 오계서원의 전신이다. 1570(선조3)에 이덕홍(李德弘)이 현재의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의 태조봉(太祖峯) 남쪽 기슭에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세운 정사이다.

    [-D002] 여울 …… 얻었는가 : 

    맹자》 〈진심 상(盡心上)물을 관찰하는 방법이 있다. 반드시 여울을 보아야 할 것이다.[觀水有術, 必觀其瀾.]”라는 말이 나온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 병화로 정사가 퇴폐된 것을 1600(선조 33,경자)에 선생의 장자 선오당 이시가 오천마을의 원당천과 구천의 합류지점에 오계정사(오계서당)를 옮겼다. 1636521일에 대홍수로 서당의 거의 모든 건물이 표실되었다. 이때 현판이라도 찾으려고 향내의 유림들이 냇물을 따라 예천군 보문까지 백여 리를 냇가는 물론 강바닥까지 파헤쳐도 찾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신천변(현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에서 쉬고 있을 때 건너편 바위 밑에서 석양을 받아 서기가 어리므로 이상히 여기고 건너 가서 물속을 살피니 관성재등 서원 현판이 있었다. 이때 현판을 얻은 바위라는 뜻에서 이 바위를 오계암으로 이름하였다. 1663년 여름에 향내의 선비들이 간재선생의 사당 건립을 논의하여 1665(현종 6, 을사) 10월에 도존사에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91(숙종 17, 신미)에 영주 사림에서 오계서당을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강당을 명륜당, 정문을 입도문이라 하였다.

    1711(숙종 37, 신묘)에 현재의 위치에 복설하였고 1724(경종 4, 갑진)에 영주사림의 공론으로 간재선생의 장자 선오당 이시를 배향하였다. 그 뒤 1868(고종 5, 무진) 8월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것을 1919(기미)에 복향하기 위하여 명륜당.관성재.험위료.입도문.주소를 다시 세웠고 1973년에 입도문 중수, 1975년에 관성재.험위료를 중수하였다. 1978년 음력 38일에 도존사를 다시 짓고 복향하였다. 1993(계유) 12월에 주소를 중건하였다. 유물로는 목판 300장이 있고 재산으로는 전답 7,000, 임야 10정보, 대지 1,000평이 있다. 향례는 매년 음력 3,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행한다.

    오계서원 이건기

    살펴 보건대, 무릇 이룸이 있으면 반드시 헐림이 있고 일으킴이 있으면 반드시 무너짐이 있으니 이룸과 헐림, 무너짐과 일으킴이 서로 순환함은 이치의 떳떳함으로 모든 물건이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나 아직까지 이루고서 헐리지 않거나 헐리어서 다시 이루는 경우는 드물며 또 일으켜서 무너지지 아니하거나 무너져서 다시 일으키는 경우도 대개 적은 편이다. 헐릴 적마다 이루고 무너질 적마다 일으켜서 늘 이루어 헐리지 않게 하고 늘 일으켜 무너지지 않게 함은 그 책임이 사람에게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성심으로 이루고 성심으로 일으키지 아니한다면 또한 어떻게 그로 하여금 반드시 이루어 반드시 헐리지 않게 하고 반 듯 일으켜 반드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이 서원은 처음에 오계의 상류에 있었으니 옛날 우리의 간재 이 선생이 이를 이루셨다. 임진왜란 때에 병화로 소실되고 그 뒤 28년이 지나 쌍계 위로 옮겨지었다가 병자(1636)년에 큰물에 떠내려가서 허물어지고 다만 몇 칸이 남았을 뿐이었다. 계묘(1663)년에 향내 선비들이 이곳에 선생의 사당을 세웠으며 경오(1690)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신묘(1711)년에 서원이 냇물 가까이 위치해서 늘 물드는 게 근심이었더니 이때 산장 송민도씨가 서원의 여러 유생들과 상의하여 서북 두 산의 중간, 부곡이라 부르는 곳에 터를 얻어 이건하니 옛터에서 백여 걸음의 거리에 있다. 부곡이라는 지명은 아마 골짜기가 고리처럼 둥글며 가마솥 같으므로 해서 붙여진 것이리라. ! 임진년으로부터 신묘년까지 백여 년 사이에 헐리고 무너짐이 무릇 몇 번이며 이루고 일으킴이 무릇 몇 차례인가. 병란으로 헐리면 사람이 이루어내고 큰물에 무너지면 사람이 병란으로 화를 입고 물로 재앙을 당하는 것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으나 헐리면 이루어내고 무너지면 일으켜서 사람의 책임을 다하였으니 성심이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계속 이루고 계속 일으켜서 우리 선생에게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니 그 이룸이 크고 그 일으킴이 높다. 이후 선생을 사모하여 높이 받드는 자들의 정성스런 마음과 사랑하고 기뻐함이 오래 될수록 더욱 확대될 것이고 이 서원도 장차 그와 더불어 헐리지 않고 늘 이루어지며 무너지지 않고 늘 일으켜지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서원에는 옛날 퇴계 선생이 손수 쓴 글씨가 있었으니 경재잠과 백록동규이고 간재 선생이 제목을 붙여서 읊은 시가 5수 있으니 관성재와 관서헌과 험위료와 활발대와 군자당이다. 정한강, 장여헌 및 김백암, 권회곡 등 원로 선생들이 왕래하며 남긴 자취가 있어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만한 것이 한 둘에 그치지 아니하거니와 이것은 서적에서 상고하여 알수 있는 것이다. 서원의 모든 일은 현 원장인 김응주씨가 실지로 주관해 시행하는데 나에게 기문 써 주기를 청하기에 나 또한 예전에 당장을 지낸 적이 있어 기꺼이 이 기문을 짓는다. 신축(1721) 8월 하순 통훈대부 전 서천군수 나학천 씀.




    간재종택


    지정번호 : 안동시문화유산 제55

    지정일자 : 2010312

    소재지 : 안동시 녹전면 외내112-1(원천리)

    소유자 : 영천이씨 문중

     

    외내 마을 가운데 있는 이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던 간재 이덕홍(1541 ~ 1596)의 종택으로 당호는 선오당인데, 현판 글씨는 임자년(1912)에 해사 김성근(1835 ~ 1919)이 썼다. 뒤로는 태조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농경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어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대지의 주위로는 인근 집들이 인접하지 않고 경사지가 집 둘레를 아늑하게 감싸 안았다.

    간재 이덕홍이 1568(선조 1)에 서쪽 시내 부근에 지은 집을 맏아들인 선오당 이시가 이어받았고, 병자년(1636) 5월 대홍수로 종택이 표실되자 간재 선생의 亭閣정각이 있던 현 위치로 옮겨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현 건물은 비록 건립연대가 오래되어 보이지 않으나 일곽에 묘우를 갖추고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대문간채가 있는 예로서 건축적인 가치는 있다. 서쪽으로 시내를 건너 산길을 따라가면 오계서원과 군자정이 나온다





    원천리암각화 

     

    발자국 모양의 암각화로 사실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원천교회 뒤편, 개울가 동쪽 바위 위에 있다. 장군 발자국이라는 전설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찾아가는 길이 없어 일반인이 식별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때 마을 간이상수도의 수원이 있던 곳이며 20123월에 안동대 임세권 교수 일행이 이 암각화에 대해 문화재조사를 한바 있다.